弱肉強食 약육강식
약한 건 고기고, 강자는 이를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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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열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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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은 2018년의 겨울, 오랜 길거리 생활과 추위, 불균형한 영양 탓에 심한 열감기를 앓았다. 그러나 실종자 신세로는 병원엔 갈 수 없었고, 떠돌이 신세인지라 쉴 수 있는 번듯한 공간도 없었다. 찜질방이라도 갈까, 싶었으나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잠시 눈이라도 붙일 심산으로 유진은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향했다. 그리곤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골을 울리는 두통과 열을 잊으려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어느새 정신을 놓아버리고 만다.
유진이 정신을 차렸을 때, 유진은 낯선 천장 아래였다. 하얀 침대. 하얀 러그. 반투명한 대리석 바닥. 온통 하얀 방. 내가 설마 이 젊은 나이에 빌어먹을 신의 부름을 받고 저승에 끌려온 것인가? 하고 유진이 어리둥절하던 찰나, 방문이 열렸다.
" 깨어났네요, 괜찮아요? "
검은 머리의 여자였다. 다행히도 이곳은 저승이 아닌 것 같았다. 여자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유진의 이마를 짚어보며 말했다.
"열은 내렸네요 , 다행이다."
이번엔 미소 지었다.
" 사람이 쓰려져 있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
여자의 이름은 다정이랬다. 나이는 유진과 동갑내기. 유진이 짧은 시간 동안 파악한 결과, 그녀는 성격도 이름 같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낯선 남자를 혼자 사는 집에 들일 만큼 조심성이 없는 등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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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은 퇴근길, 집 앞 골목에서 정신을 놓고 쓰러진 한 사람을 발견한다. 180 정도 되는 키의 남자. 검은 후드, 앓는 표정. 굶었는지 마른 볼, 검은 머리를 축축하게 적신 땀과 펄펄 끓는 열.
" 저기요, 괜찮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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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은 그를 집으로 데려왔다. 부축이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힘들어할 정신이 없었다. 금방이라도 사람이 죽을 것 같은데. 다정은 결코 타인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를 집에 데려온 것도 오랜 습관 같은 일이었다. 물수건으로 이마를 닦아주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생명은 그만큼 고귀한 것이니까.
급한 처치를 마치고 다정은 그를 조용히 내려다봤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에 사람이 온 게 얼마 만이지.' 갑자기 모든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다정은 조심스럽게 그의 이마에 손을 짚어봤다. 여전히 뜨거웠다. 분명한 사람의 온기였다.
다정은 뼛속까지 외톨이었다, 사람의 체온을 느낀 지 얼마나 됐는지 셀 수가 없었다. 갑자기 심장이 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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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유진이랬다.
다정은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 갈 곳이 없으면, 여기서 지내지 않을래? "
난 수상한 사람은 아니야.
맹세해.
02. 에코와 나르키소스
유진과 함께 살게 된 이후로, 다정은 유진을 사랑하게 됐다. 유진이는 이상한 인력을 가진 아이였다. 유진이는 자꾸만 시선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아이였다. 유진인 항상 묵묵했다, 무엇이 좋다,무엇이 싫다고 말하지 않았다. 다정은 그런 유진이 궁금했다. 무엇을 해야 네가 좋아할까? 널 위해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까.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를 위한 고민을 하고 있을 때엔, 살아있는 것 같았다. 유진은 다정이라는 인간의 삶에 목적이 되었다. 신앙심 같은 사랑이었다. 다정은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했다. 집안일, 요리, 금전적 지원, 의식주 …….
하지만 다정은, 유진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그를 사랑했지만, 유진에게는 그 무엇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유진에겐 다정의 마음을 책임질 의무가 없으니까. 유진과 어색해지긴 죽어도 싫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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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이 깨닫게 된바. 다정은 유진을 사랑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기이했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다정이 유진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 여자는 나만 보면 눈웃음을 흘렸다. 너를 정말로 아껴,라는 말이 저절로 읽히는 눈빛이었다.
유진은 포식자였다. 약점 잡을 수 있는 것은 물고 놓치지 않는 놈이었다.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재미를 위해 도려낸 잔혹한 악마였다. 그런 유진이, 누군가의 마음이라고 이용하지 못할 리가 있나. 약한 건 고기고, 강자는 이를 먹는다. 이건 당연한 섭리였다.
유진은 다정의 사랑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녀의 지원을 받으며 가능한 한 오래오래 그녀의 집에 기생하기로 했다. 유진에겐 다정을 위한 소꿉놀이가 너무도 쉬웠다. 거짓말은 어머니에게 수없이 지적받고도 고치지 못한 오랜 습관이었다.
03. 당신은 누구인가.
2023년 어느 겨울날. 다정은 군도 신도시에서 열린 H군 추모 행사에 대한 뉴스를 접하게 된다. 칼잡이 김해진이라…. 양부모를 죽이다니 정말 끔찍하네. 친아들은 무슨 죄람. 그런 사건도 있었구나, 하고 뉴스의 내용을 아무렇지 않게 따라가던 때, 다정은 뉴스 동영상 자료에 스쳐 간 H군의 증명사진을 보고 묘한 기시감을 느끼게 된다.
짧게 스쳐 지나가긴 했지만, 모자이크로 눈이 가려져 있었지만. 다정이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매일 아침마다 깨워주고, 매일 생각하고. 항상 귀여워했던 얼굴이니까. 그는 분명히 유진이었다. 이상했다. 왜 멀쩡히 살아있는 우리 유진이를 추모하는 걸까. 도대체 왜. 다정은 곧바로 차를 타고 군도 신시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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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복잡했다.
다정은 차로 이동하는 2시간 내내 제발 유진이 아니길 간절히 빌었다. 그냥 닮은 사람이었으면 했다. 하지만 추모행사장에서 마주친 모자이크 없는 얼굴은 분명 유진이였다. 저 때나 지금이나 얼굴이 똑같았다. H군의 본명 또한 한유진이었다. 사진, H군의 본명, 칼잡이 김해진 사건,머릿속에 끼워 맞춰지는 정황들……. 동네에서 일어나고 있는 살인 사건…….
다정의 머릿속에선 하나의 시나리오가 쓰였다. 다정은 자신의 머리가 이렇게 기민하게 돌아갈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 유진은 살인을 저지르고 실종 처리 됐다. 그리고 갈 곳 없이 떠돌다, 나와 지내게 된다. '
입에서 헉 소리가 났다. 끔찍했다. 천사인 줄 알고 사랑했던 아이가 살인마라니. 그동안 조금의 수상함도 느끼지 못했다니. 만약에 위의 가정이 맞다면, 동네에서 일어나고 있는 살인사건의 범인도 유진일 것이다. 두려워서 눈물이 났다. 하지만 유진이 두려웠던 건 아니었다. 앞으로도 자신이 유진을 포기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 두려웠다. 식지 않는 마음이 무서웠다.
다정은 묻고 갈 생각이었다, 모른 척할 생각이었다. 김해진 사건은 세간에서 묻혀가는 중인 시간이 지난 일이었다. 거의 사실에 가까울지라도 우선 이 모든 것은 다정의 추측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리고……. 다정은 무엇보다도 유진을 많이 사랑했다. 그래서 그녀는 군도 신도시에서 돌아와서도 유진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평소처럼 지냈다.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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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은 다정의 행동이 조금 이상했다. 침울해 보이기도 하고,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괜찮은 척 표정을 수습하는 기색이었으나 직감은 "숨기는 일이 있다." 고 말하고 있었다.
다정은 밖에서 있었던 일을 숨기는 법이 없는 인간이었다. 고해라도 하듯 밖에서 있었던 속상한 일들을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다 털어놓는 인간이었다,유진에게 다 털어놓고 위안받는 사람이었다.
유진을 보며 웃고, 곁에 있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다정은 유진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청군과 백군이 합심해서 외치기 시작했다.
'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해.'
얼마 전, 다정이 하루 동안 집을 비운 적이 있었다. 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반찬이야 냉장고에서 꺼내면 되고, 밥이야 하면 됐다. 그냥 어딜 다녀오는 모양이네, 하고 넘겼었는데. 다정은 그날 이후로 이상했다. 분명히 " 유진에게 숨기는 일" 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서 유진은 다정의 방에 들어가 보았다.
다정의 노트북을 열었다,비밀번호는 걸려있지 않았다. 허술한 인간이었다. 비밀이 있어도 숨길 줄 모르는 사람.
홈 화면엔 이상한 게 없었다.
검색 기록을 열어보았다.
🔍 면도칼 살인사건.
🔍 김해진 사건.
🔍 김해진 사건 추모행사.
🔍 군도신도시.
🔍 2016년 군도신도시 일가족 살인사건.
유진은 생각했다.
다정이 내 범행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다.
04. 플레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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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묻고 갈 거야. 자수하라고도 안 할 거야. 정말이라니까. 어디 가서 말하지도 않을게."
"이대로가 좋아 나는."
"정말로?"
"그래 정말이야,정말.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왜 해. ...추모 행사는 그냥 확인차 가본 거야."
"그럼 됐어."
유진은 됐다고 말해놓고도 찝찝했다,다정이 당장에라도 한배를 탔다는 불쾌감에 헤까닥 돌아서는 자수하러 가자고 등 떠밀까 봐. 아니면 몰래 자신을 신고할까 봐.
살려둘 수 없었다, 또다시 안락한 생활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하긴 싫었지만, 자유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떨며 살고 싶진 않았다. 이러면 어머니와 살 때랑 다름이 없지 않은가. 관계의 우위가 바뀐 데에서 나오는 불쾌감도 싫었고,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다정의 비위를 맞추기도 싫었다.
유진은 다정을 살해하기로 결정했다.
05. Six Feet Under
일주일 후,두 사람은 군도 신도시로 발걸음 했다. 몇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군도 신도시는 으슥했다, 그리고 밤엔 특히 조용했다. '김해진 사건'이 있었던 이후 CCTV가 조금 늘어났을 뿐 커다란 변화는 없었다. 오히려 그때보다 거주하는 인구가 더 줄어든 것 같았다. '김해진 사건'이 낳은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차를 근처 방사제에 주차하고,유진과 다정은 밤바다를 내려다보았다. 곧 비나 눈이 내릴 것 같은 우중충한 날씨였다.
"네가 먼저 여기에 오자고 할 줄 몰랐네. 와보고 싶었어?"
"그냥,아직도 살아있는 인간을 추모하고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와본 적 없으니까 궁금하기도 하고. 그리고... "
"그리고?"
"네가 다 알았잖아, 다정아."
"내가 공들여서 숨기던 일."
"있잖아, 나는 후환이 싫어."
헉,
유진은 그녀를 방사제 끄트머리로 끌고 갔다. 그리고 바다에 떠밀어 살해했다. 검은 물은 다정을 빠르게 삼켰다. 혹시나 다정이 살아남을까 걱정이 되진 않았다.
유진이 알고 있는바,다정은 심각한 맥주병이었다.
그리고 다정은 자살로 처리되었다.
자차를 타고 바다로 향했고, 무엇보다 유진이 위장해둔 유서가 있었다. 블랙박스의 전원 잭은 유진의 손에 뽑혀 있었다. 당연하게도 CCTV나 목격자는 없었고, 살해 정황도 없었다. 무엇보다 먼 과거, 우울증을 앓았던 점이 자살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했다.
마지막까지 다정은 쉬운 인간이었다.
유진은 애초에 실종 처리가 된 인간이기에 도주만 하면 그만이었다. 살인 사건이라고 판명이 나더라도 애초에 용의 선상에 들어갈 수 없었다. 한유진은 이 세상에 없는 인간이니까. 이미 추모 받고 있는 사람이니까.
유진은 다정의 집에 남은 자신의 흔적을 조용히 처리하고, 금품을 훔쳐서 달아났다.
완전범죄였다.
유진은 앞으로도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삶에 대한 애착을 잃지 않을 것이다. 유진의 세상에서는 자신의 목숨만이 고귀한 것이었다. 약한 건 고기고, 강자는 이를 먹는다. 유진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말이었다.